계절의 기록
붉은고양이82026. 04. 30. 08: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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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서울에서 나는 매일, 매일, 조금씩 메말라 가는 나무와 같았다.
스물넷, 철없이 온 마음을 내던졌던 첫사랑의 이름은 최영식이었다.
허우대 잘생기고 말주변이 좋아 어디서나 눈에 띄던 남자였다.
낯선 서울 땅에서 혼자 외롭고 방황하던 나를 향해 영식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으며 호기롭게 던지던 말들은, 당시의 나를 완벽하게 매료시켰다.
"혜진아, 넌 그냥 내 뒤에만 딱 붙어 있어. 서울 하늘 아래서 그 누구도 너 건드리지 못하게 내가 다 막아줄 테니까."
자신만만한 눈빛과 거침없는 말투. 세상을 다 가진 듯 굴던 그의 장담은 혼자서 세찬 세상 바람을 맞서야 했던 나에게 거대한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그 강렬한 존재감이 내 그늘진 삶을 환하게 비춰줄 따스한 햇살인 줄만 알고 온 마음을 빼앗기는 건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뿜던 빛은 나를 감싸는 온기가 아니라, 나를 바싹 말려 죽이는 지독한 열기였다.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일이 내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내뱉는 통제와 요구에도, 나는 그저 그 강렬함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라 착각하며 순순히 나 자신을 길들여 갔었다.
"혜진아, 넌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 알았지?"
"응... 그럴게, 영식 씨."
거절이나 의문은 감히 품지도 못했다.
특히 여자로서 내 몸을 온전히 내어준 그 첫 밤 이후, 나는 더욱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늪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밤, 영식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였다.
아무것도 몰라 굳어있는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며 나를 완벽하게 무장해제 시켰다.
"괜찮아, 혜진아. 오빠만 믿어. 절대 아프게 안 할 테니까 그냥 나한테 다 맡기면 돼."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따뜻한 체온이 내 살갗을 천천히 조여왔다.
내 옷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예민한 피부 구석구석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내 안의 긴장과 경계심을 완전히 녹여냈다.
그 섬세하고 따뜻한 어루만짐에 나는 온몸의 힘이 빠지며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었다.
뒤이어 내 안으로 남자의 묵직한 존재감이 파고들 때, 낯선 고통이 척추를 타고 차올랐다.
나도 모르게 이불을 그러쥐며 신음을 뱉었지만, 영식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숨을 고르게해주었다.
지독한 통증 끝에 남자의 체온이 가득 찼을 때, 이상한 안도감과 벅찬 기쁨이 함께 밀려왔다.
나라는 여자의 가장 소중한 '처음'을 이토록 다정하게 안아준 사람.
내가 이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확신과 함께, 영식의 눈빛에서 스쳐 지나가던 은밀한 정복감마저 나를 향한 깊은 사랑이라 믿어 버렸다.
'이 정도로 나를 소중하게 안아준 남자라면, 내 평생을 맡겨도 좋겠지.'
이제는 이 남자와 죽을 때까지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신념이 그 벅찬 통증 속에서 단단하게 굳어져 갔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섞고 내 의지를 그에게 완전히 맡길수록, 나를 사로잡던 그의 다정함은 점차 사라지고 거침없고 오만한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 경험 이후 내가 자신에게 완전히 속박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영식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통제하려 들었다.
시작은 자잘한 시비와 통제였다.
나의 옷차림, 내가 만나는 친구, 내 하루의 동선 하나하나까지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 했다.
"너 오늘 그 옷 입고 어디 가냐? 내가 다른 놈들 눈에 띄게 입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그냥 친구 만나러 가는 건데..."
"너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랬잖아. 말 안 들어?"
어디서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지 늘 밖으로 겉돌던 그 사람은 정작 자신에 대한 질문은 단 한 마디도 용납하지 않았다.
밤늦게 걸려 오는 여자들의 전화, 옷깃에 묻어나는 낯선 화장품 냄새를 참다못해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돌아온 것은 차가운 폭력이었다.
"영식 씨, 어제 그 전화는 누구야? 옷에서 여자 향수 냄새도 나고..."
짝-!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든 거친 손바닥이 내 뺨을 후려쳤다.
매서운 충격에 고개가 돌아가고 입술 터진 피가 입안을 비릿하게 채웠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영식은 내 머리채를 잡아 쥐고 눈앞까지 얼굴을 밀어 넣었다.
"어디서 건방지게 나를 취조하려 들어? 넌 그냥 내가 오라면 오고, 있으라면 있는 인형이야. 알겠어?"
그날 이후 그의 고함과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세상을 다 가질 것처럼 호기롭게 던지던 화려한 말들은 나를 짓밟고 가두기 위한 거친 언어폭력으로 변해버렸다.
부드럽게 감싸줄 줄 알았던 그 강렬함은 내 모든 판단과 자유를 갉아먹으며 나라는 존재를 뿌리째 잡아먹기 시작했다.
지옥 같은 나날을 참다못해, 결국 내가 살던 작은 월세집에서 마지막으로 이별을 통보했던 날이었다.
"영식 씨, 우리 이제 그만하자.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제발 떠나줘."
내 입에서 나온 '이별'이라는 단어는 그 남자의 광기를 완벽하게 건드렸다.
"뭐? 그만해? 야, 이 혜진이 너 내가 사람 만들어 놨더니 머리 좀 굵어졌다 이거냐? 네가 날 버려?"
영식은 눈이 뒤집힌 채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고, 서랍장과 가구들을 미친 듯이 집어 던지며 부수기 시작했다. 유리창이 깨지고 물건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너 이 집에서 한 발짝만 나아가 봐. 내가 너랑 네 가족까지 싹 다 죽여버릴 테니까!"
폭주하는 남자의 광기를 보며 저 사람에게 붙잡히면 정말 오늘 밤 시체가 되어 나갈지도 몰라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영식이가 방 안의 물건을 부수며 난동을 부리는 틈을 타, 나는 손에 잡히는 옷가지 몇 개만 가방에 처박은 채 맨발로 문을 열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가방 하나만 딸랑 든 채 도망쳐 내려온 나를 가슴에 안고 함께 울어준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벌벌 떠는 내 손을 잡고 지방의 친척 집 깊숙한 곳으로 나를 피신시켰다.
하지만 영식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사라진 것을 안 영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가 주소를 알아내 찾아왔다.
대문을 발로 차고 집안 기물을 부술 듯 소리를 지르며, 낮이고 밤이고 행패를 부렸다.
혜진이 당장 내놓으라고, 안 내놓으면 이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 거칠고 험악한 남자를 상대해야 했던 건 온전히 환갑을 바라보는 어머니 혼자였다.
영식이 대문을 부술 기세로 날뛰면 어머니는 마당으로 나가 딸의 앞을 막아서듯 단호하게 스크럼을 쳤다.
멱살을 잡힐 뻔하고 거친 욕설이 귓가를 찢어도 어머니의 눈빛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내 딸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내가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서라도 너 평생 감옥에 처넣을 줄 알아라!"
동네 순경이 출동하고 경찰서를 몇 번씩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폭행 흔적과 부서진 집안 사진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당당하게 맞섰다.
딸을 죽이려 덤벼드는 악마 앞에서 어머니는 딸을 지키기 위한 거대한 산이자 투사였다.
결국 어머니의 기슬린 기세에 질려버린 영식은 발길을 돌렸다.
당신 혼자서 그 지옥 같은 남자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끝내 나를 지켜내신 것이다.
그 난리가 치러지는 동안, 어머니는 내가 불안해할까 봐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힘든 티를 내지 않으셨다.
밤늦게 걸려 온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유난히 잠겨 있었지만, 전하는 말만큼은 더없이 다정했다.
"혜진아, 아무 걱정 하지 마라. 그놈 이제 다시는 너한테 못 간다. 엄마가 다 정리했으니까 너는 그저 밥 잘 먹고 몸 추스르고 있어라, 알았지?"
수화기를 들고 목놓아 울던 그 밤, 깨달았다. 어머니는 내게 단순한 부모를 넘어 내 부서진 삶을 건져 올려준 구원자였다.
그렇게 영식이라는 지독한 흉터와 사랑에 대한 깊은 환멸만을 안은 채, 나는 어머니가 마련해 준 지방의 작은 도시로 내려왔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 그 어떤 남자도 믿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지방으로 내려온 뒤에도 한동안 내 시간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자다가도 영식이 대문을 부수며 찾아오는 환청에 놀라 깨어났고, 문밖에서 작은 발소리만 들려도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부서진 채, 나는 그렇게 어두운 방안에 갇혀 지독한 상처의 겨울을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봄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그늘 뒤에 숨어 스물넷의 삶을 팽개쳐 둘 수는 없었다.
껍데기만 남은 삶이라도 다시 살아가야 했다.
상처를 털어내고 내 힘으로 밥벌이를 시작해야 비로소 이 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내게 단번에 자리를 내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며칠을 헤맨 끝에 겨우 구한 것은 동네 작은 카페의 카운터를 지키는 주말 알바 자리였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고 손이 꼬이기 일쑤였지만, 신기하게도 몸이 고될수록 가슴을 짓누르던 묵직한 공포는 조금씩 희미해져 갔었다.
내 손으로 벌어 살아간다는 그 소박한 노동의 감각이, 바짝 메말라 죽어있던 내 삶에 아주 천천히 수분을 공급해 주는 듯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커피 향을 맡고 그릇을 닦는 사이, 계절은 어김없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덧 창밖의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내리고, 칼바람 대신 알싸하면서도 부드럽게 번지는 공기가 새어 들기 시작했다.
찌르는 듯한 추위가 물러가고 살랑이는 바람에 마음의 먼지가 조금씩 씻겨 나가던 어느 나른한 봄날 오후였다.
"매일 오는데, 커피 맛이 늘 변함없이 참 좋네요. 잘 마시겠습니다."
정중하고 담백한 인사 한 마디였다.
그 사람은 커피를 받아 들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나가거나,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자기 서류를 살피곤 했다.
다 마신 잔을 카운터에 반납할 때도 "잘 마셨습니다" 하고 짧게 인사를 남기는 게 전부였다.
다른 손님들과 다를 게 전혀 없는 평범한 행동이었지만, 그 일상이 매일같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에 익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회사 직원 몇 명이 함께 카페로 들어왔다.
주문을 하던 직원 하나가 뒤에 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계장님, 여기 진짜 자주 오시네요? 직원들이 왜 자꾸 이 카페 커피만 사 오나 했더니, 계장님 단골집이라 그런 거였어요?"
그 말에 남자는 그저 덤덤하게 허허 웃으며 "여기 커피가 제일 깔끔해서 그래" 하고 짧게 답할 뿐이었다.
그제야 그 사람이 근처 중소기업의 '김도현 계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영식처럼 화려하거나 과장된 구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첫인상은 오히려 약간 무뚝뚝함에 가까웠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무표정한 얼굴만 보면 조금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에 대한 공포로 온통 경계심만 가득하던 시기였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비추는 그 남자의 덤덤하고 해가 없는 태도에는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사랑이나 설렘이라기보다는, 그저 그 공간에서 가장 익숙하고 위험하지 않은 손님 하나로 의식이 되기 시작한 정도였다.
첫사랑 영식이 지독한 불길 같아서 내 모든 삶을 바싹 말려 죽인 혹독한 겨울이었다면, 도현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해 보였지만, 그 무던함 속에는 사람을 은근하게 안심시키는 온기가 깔려 있었다.
화려한 말로 나를 주무르려 하지도 않았고, 과시하듯 힘을 내뿜지도 않는 사람.
그 무해하고 단단한 기운이 날이 서 있던 내 경계심을 조금씩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직원들이 카운터 옆에서 나지막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동현 계장님 매일 이 카페 출근도장 찍는 거 봤어? 커피도 잘 안 마시던 사람이 왜 그러나 했더니..."
"그러게. 눈빛이 딱 저 알바분한테 빠진 눈빛이던데? 회사에서도 괜히 싱글벙글하고 말이야."
그 서툴고 순수한 마음이 전해 들려오자, 내 가슴 한구석에 다정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며칠 뒤 한가해진 늦은 오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든 동현이 곧바로 나가지 않고 카운터 앞에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매일 이렇게 친절하게 웃어주셔서 정말 감사한데요. 근데 이상하게... 그 웃음이 어딘가 조금 슬퍼 보여서 마음이 자꾸 아픕니다. 영업용 미소라는 건 아는데, 그 눈 뒤에 어두운 그늘이 있는 것 같아서요. 어떻게 해야 제 앞에서 진짜로 한 번 웃어주실까... 요즘은 퇴근할 때마다 온통 그 생각뿐입니다."
화려한 수식어가 아닌, 밤마다 혼자 끙끙대며 고민했을 법한 정직하고 투박한 고백. 내 상처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고 안타까워해 주는 그 사람의 진심 어린 눈빛이 가슴에 와닿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 두껍게 둘러치고 있던 가짜 미소가 허물어지며,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이후, 우리는 카페 카운터를 벗어나 조금씩 서로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퇴근 시간이 맞으면 카페 근처의 작고 소박한 기사식당이나 국밥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도현 씨는 결코 서두르거나 욕심을 내지 않았다.
늘 내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걸어주었고, 길을 걸을 때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도로 쪽을 막아 서주었다.
음식이 나오면 내 앞에 수저와 휴지를 먼저 놓아주고,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그저 아빠처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주말이면 읍내 외곽의 호숫가 산책로를 걸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캔커피를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이야기, 회사에서 있었던 소소한 실수담, 화단에 심어놓은 토마토 싹이 텄다는 소박한 대화들. 영식과의 관계에서 늘 숨이 턱까지 막히는 긴장감과 눈치만 살폈던 나에게, 도현 씨와의 시간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완벽한 평화이자 휴식이었다.
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어느 날 저녁,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걸어가던 길이었다.
남자의 어깨가 빗물에 다 젖어가는 줄도 모르고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던 그 다정한 배려.
내 발걸음이 꼬여 슬쩍 남자의 옷깃을 잡았을 때, 도현 씨는 빗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 작고 가느다란 손을 가만히 감싸 잡았다.
크고 투박하지만 투명하리만치 따뜻한 체온. 남자의 손길이 내 손가락 사이로 밀려들 때, 가슴 한구석에서 몽글몽글하게 피어나던 안도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라는 존재를 그저 욕망의 대상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정직한 마음. 그 깊은 온기 속에서 내 마음의 얼음장 같던 빗장이 완전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소중한 계절이 물들어 가던 어느 주말 저녁, 도현 씨는 자신이 혼자 사는 작은 자취방으로 나를 초대했다.
남자의 집은 주인 닮아 단정하고 깔끔했다.
도현 씨는 서툰 솜씨로 자작자작 정성껏 찌개를 끓이고 반찬을 차려 따뜻한 저녁 밥상을 내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였다.
식탁 위로 흐르는 평온한 정적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가슴속 멍울을 천천히 꺼내놓기 시작했다.
"도현 씨... 실은 저, 서울에서 지독하게 나쁜 사람을 만나서 도망쳐 내려온 거예요."
찻잔을 움켜쥔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차마 다 밝히지 못했던 지난날의 상처들—서울에서 만났던 첫사랑 남자가 얼마나 거칠고 폭력적이었는지, 그 사람의 통제와 집착을 피해 도망쳐 내려오며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부서졌었는지를 떨리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내 도현 씨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의 눈에 붉은 안타까움이 고여 올 뿐이었다.
말이 끝나고 내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도현 씨는 식탁 넘어 내 떨리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혜진 씨... 그런 지옥 같은 시간을 혼자 어떻게 견뎠어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어떤 결의보다 단단했다. 도현 씨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진심을 건네왔다.
"난 절대 그런 사람 아니에요. 혜진 씨가 과거에 어떤 아픔을 겪었든, 내가 그 상처 다 덮어줄 테니까... 다시는 겁내지 마요. 평생 동안 내가 소중하게 아끼고 지켜줄게요."
그 투박하지만 진실한 약속에 내 마음속 마지막 남았던 두려움마저 완전히 녹아내렸다.
과거의 참담했던 기억을 온전히 보듬어주는 남자의 진심 앞에서, 나는 닫아 두었던 내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고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고 따뜻한 주황빛 조명 아래, 도현 씨는 침대 끝에 앉은 내 앞에 조심스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사람은 내 손을 꼭 잡고 가만히 온기를 나누더니,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리그릇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내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상대의 기분은 상관없이 제 욕구만 빠르게 채우고 돌아서던 영식과의 이기적인 정사만 경험했던 내게, 도현의 손길은 생소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맨살이 드러날 때마다 동현의 눈빛은 나라는 존재를 마주한 깊은 애탄함과 조심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괜찮아요... 서두르지 않을게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내 이마와 눈가, 그리고 볼에 아주 천천히 입술을 매만졌다.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몸 위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굳어있던 감각이 기분 좋게 돋아났다. 내 안으로 파고들어 오기 전, 그 사람은 잠시 멈춰 서서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며 나라는 여자가 준비될 때까지 성실하게 체온을 맞추어 왔다.
천천히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남자의 묵직한 존재감. 그 감각이 안을 가득 채울 때, 동현은 나를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 주었다.
내가 절정에 다다라 신음을 내뱉았을 때, 동현 역시 내 귓가에 입술을 묻고 떨리는 숨을 내쉬며 자기 안의 가장 따뜻한 기운을 채워 넣어 주었다.
가벼운 욕망 처리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대접하고 아껴주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둘이 침대에 누웠을 때도, 그 사람은 바로 돌아눕지 않았다.
나를 자신의 팔베개 위에 가만히 눕히고, 이불을 어깨까지 꼭 덮어주었다.
그리고 내 이마와 입술에 잔잔한 키스를 퍼부으며 나를 품 안에 꼭 안아주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그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지난날 받았던 깊은 흉터들이 깔끔하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극진히 대접받고 소중히 아껴지는 기분 속에서 나는 완벽하게 구원받았다.
그렇게 나의 계절에도 지쳤던 마음을 다독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봄이 완성되었다.
여름
그 밤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서로를 향한 정직한 마음을 확인하고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계절은 어느덧 만물이 녹음을 더해가는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한번 물꼬가 튼 우리의 사랑은 찌는 듯한 여름 더위조차 무릎을 꿇을 만큼 뜨겁고 격렬하게 타올랐다.
무더운 여름날의 기온보다 우리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열망이 훨씬 더 뜨거웠다.
서로의 숨결과 체온에 푹 빠져 있던 우리에게는 시간도, 장소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카페 브레이크 타임, 손님이 다 빠져나간 한낮의 카페 구석 창고에서도 우리의 열정은 폭발했다.
원두 자루와 박스들이 쌓인 좁고 어스름한 공간에서 도현 씨가 내 허리를 가만히 감싸 안아 선반 위에 앉히면, 나는 그 사람의 목을 끌어안고 숨이 차오르도록 입을 맞췄다.
스커트를 살며시 올리고 서로의 체온을 밀착시켜 넣을 때마다, 밖에서 누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아찔한 긴장감과 좁은 창고를 채우는 나직한 숨소리가 어우러져 한낮의 사랑은 미칠 듯이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그 자극적인 순간에도 도현 씨는 결코 거칠게 구는 법이 없었다.
선반에 닿은 내 허벅지가 아프지 않도록 자기 손바닥으로 감싸 받쳐주었고, 내 숨이 가빠지면 천천히 템포를 조절해 가며 나를 따뜻하게 다독여주었다.
퇴근 후 어둠이 짙게 깔리면 우리는 인적 드문 공원 외곽으로 차를 몰거나 조용한 밤길을 걸었다.
시동을 끈 차 안, 시트를 뒤로 깊게 젖히고 남자의 몸 위로 올라타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면 통유리창 너머 밤하늘의 별들이 아득하게 흔들렸다.
더욱 아찔했던 건 한여름 밤, 발길이 완전히 끊긴 공원 깊숙한 구석 벤치였다.
사방이 정적으로 감싸인 어둠 속에서, 남자의 가랑이 위에 올라타 내 은밀한 곳을 남자의 단단하게 세워진 기둥 끝에 천천히 맞추어 맞물려 내려앉을 때의 그 숨 막히는 밀착감. 찌는 듯한 한여름의 밤공기와 가슴을 철렁이게 만드는 긴장감 속에서, 내 몸이 남자의 체온 위에 온전히 뿌리내리는 순간 터져 나오던 쾌감은 미치도록 짜릿했다.
그 숨 차오르는 야외의 밀회 속에서도 도현 씨는 내 허리와 골반을 조심스레 감싸 받치며 내가 균형을 잃거나 다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가이드해 주었고, 내 미세한 떨림 하나까지 가슴에 꼭 품어 안아주었다.
도현 씨의 정갈한 자취방에서도, 내가 머무는 소박한 방에서도 우리의 밤은 식을 줄 몰랐다.
푹푹 찌는 열대야 속에서 에어컨을 틀어놓아도 몸에 알맞게 맺히는 땀방울을 서로 닦아주며 밤부터 아침까지 몇 번이고 서로를 갈구했다.
아무리 열정이 폭발하고 짜릿한 순간이라 해도 도현 씨는 언제나 나를 최우선으로 배려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괜찮은지 물어봐 주었고, 오직 내 감정과 호흡에 맞춰 천천히 속도를 조절해 주었다.
뜨거운 욕망 속에서도 나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는 그 다정함이 있었기에, 나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마음껏 사랑받는 기쁨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오신 어머니마저도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며 기쁘게 말씀하셨다.
"참 진국이고 따뜻한 사람이다. 둘이 서로 다독이면서 이쁘게 잘 살아봐라."
지방의 조그만 회사 계장으로서 착실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그 남자와, 그 남자의 다정한 품 안에서 비로소 참된 행복을 느끼는 나. 우리는 찌는 듯한 여름의 더위조차 무색하게 만들며,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단단한 서로의 미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가을 & 겨울
늦여름의 무더위가 살짝 꺾이고 찬 바람이 미세하게 감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머니의 축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도권 본가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절망적인 전화가 걸려 왔다.
급히 올라간 서울 병원에서 들은 진단은 절망 그 자체였다.
뇌출혈과 풍이 한꺼번에 덮쳐 어머니의 몸 반쪽이 완벽하게 마비되어 버렸다.
스스로 몸을 거누기는커녕 소변조차 혼자 보지 못하는 참담한 상태였다.
완치는 불가능하고, 24시간 누군가 밀착해서 수발을 들지 않으면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외동딸이자 단둘이 살아온 한부모 가정에서,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머니 곁을 지키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지방의 삶을 정리하고 올라와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보며 막막함에 떨고 있던 그때였다.
다행히 국가의 차상위계층 의료비 지원을 받게 되어 당장의 큰 병원비 숨통은 트였지만, 진짜 절망은 그 다음이었다.
어머니가 겨우 이어오던 작은 가게를 정리해 몇 푼 안 되는 돈을 치료비에 보태고 나니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번듯한 직장을 구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낮에는 집 근처 작은 카페에서 알바를 하며 푼돈을 벌고, 저녁에는 온전히 어머니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암담하고 비참한 현실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그 암흑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창밖만 바라보며 떨고 있던 그날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지방에서 일을 끝내자마자 차를 몰고 달려온 도현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 근처에 도착했다는 목소리였다.
나는 홀린 듯 병원을 잠시 나와 그 사람을 맞이했다.
어두운 모텔 방 안, 우리는 서로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의 체온을 온몸으로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를 파먹는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 남자를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 수발로 평생을 묶여 살아야 할지 모르는 이 암흑 속에, 이 소중한 사람을 같이 묶어둘 수는 없다.'
머릿속을 지배하는 이 냉정한 각오가, 역설적으로 가슴속 공포를 미친 듯이 키워냈다.
만약 이 남자를 잃는다면, 정말로 내 삶이 여기서 끝나버릴 것 같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참담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는 그 체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상실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처음에 남자가 나를 끌어안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어 올 때, 나는 몸을 내어주면서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어두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얼굴과, 손에 쥔 돈 한 푼 없는 막막한 미래, 그리고 이 남자를 보내야 한다는 슬픔이 교차하며 계속 마음이 다른 곳으로 겉돌았다.
머릿속이 찬물이라도 얹어놓은 듯 서늘하게 가라앉아, 아무리 남자가 내 피부를 어루만져도 감각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혜진아... 나 좀 봐봐, 응?"
도현 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땀에 젖은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눈을 맞추어 왔다.
그 단정하고 진실한 눈빛 속에서 나와의 이별을 감지한 듯한 안타까움과 애절함이 고스란히 읽혔다.
그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결계가 깨져나갔다.
이 다정한 남자를 오늘 밤 놓치면, 나는 정말로 다신 살 수 없으리라는 지독한 집착과 공포가 폭발하듯 차올랐다.
"도현 씨... 도현 씨..."
나는 울먹이며 도현 씨의 목을 미친 듯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안 깊숙이 자리 잡은 남자의 단단한 기둥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내 안쪽 모든 근육을 강하게 조여대기 시작했다.
단 한 순간도 그 온기가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쥐어짜듯 집착하며, 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그 존재감을 갈구했다.
"사랑해... 진짜 사랑해, 혜진아."
남자는 피하지 않고, 내 긴장과 집착, 그리고 울부짖음을 모두 받아내며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 왔다.
마치 이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깊은 결실을 내 안에 아낌없이 품어주었다.
한바탕 폭풍 같은 첫 관계가 끝나고,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내고 나오면서도, 내 영혼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듯했다.
침대 옆 화장대 의자에 멍하게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도현 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아침이 오면... 다 끝나는 걸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절망감 속에서, 내 안의 욕망과 집착이 다시 한번 불꽃처럼 타올랐다.
이 기억을 내 몸과 뼈에 완벽하게 문신처럼 새겨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지쳐 누워 있던 도현 씨의 가슴을 지그시 눌러 밀어 넘어뜨렸다.
남자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몸 위로 올라타 가랑이를 벌리고 내 안에 그 사람의 기둥을 다시 깊숙하게 맞아들였다.
위에서 남자의 가슴을 짚고 허리를 격렬하게 흔들어대며, 나는 내 눈물과 땀방울을 남자의 가슴 위로 뚝뚝 떨어뜨렸다. 미칠 듯한 집착과 슬픔, 그리고 어떻게든 이 순간을 영원히 멈춰 세우고 싶다는 복잡한 심정이 엉켜, 내 몸은 야성적일 정도로 거세게 허리를 몰아쳤다.
도현 씨 역시 내 복잡하고 서글픈 마음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 내 허리를 세심하게 감싸 쥐며 아래에서 위로 깊게 응답해 왔다. 몸을 겹친 채 서로의 눈물을 핥아주며, 우리는 새벽이 오기 직전까지 놓아주기 싫은 절박함으로 서로를 안고 또 안았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지방의 일터로 내려가야 하는 그 사람은 차분하게 옷을 입었다.
단정하게 셔츠 단추를 채우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굳어진 결심을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도현 씨... 지방 내려가면, 내가 먼저 전화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내 말에 도현 씨의 옷매무새를 다듬던 손길이 멈칫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피한 채 속말을 이었다.
"나 지금 상황이 이래서... 내가 먼저 도현 씨한테 연락할 자격도 없고, 연락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도현 씨 마음속에 미련이나 부담이 남는다면, 나 때문에 억지로 매이지 말고 천천히 정 떼고 나 잊어버려요."
내 참담한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현 씨는 천천히 돌아서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눈빛에는 내 어리석은 자책에 대한 섭섭함과 동시에 결코 흔들리지 않는 묵직한 진심이 고여 있었다.
"혜진아... 그런 일 절대 없을 거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마음 잘 추스르고 있어라."
도현 씨는 내 어깨를 꽉 감싸쥐며 나직하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남겼다.
"나 배웅 나오면 진짜 눈물 터져서 못 가니까... 여기서 인사하자.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응... 잘 가요, 도현 씨. 정말 고마웠어..."
우리는 마지막 키스를 나누었고, 차가운 철문이 닫혔다.
골목 너머로 차를 끌고 멀어져가는 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지방에서 계장 소리를 들으며 번듯하게 제 자리를 잡아가던 그 사람. 그 소중한 남자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간병과 차상위계층 지원금에 의존해야 하는 이 막막한 암흑 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낮에는 알바를 뛰고 밤에는 소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내 삶에 그 사람이 계속 머문다면, 나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그 사람마저 함께 피말라 가고 끝내 말라 죽게 될 것이 뻔했다.
'절대 내가 먼저 연락하지 말자. 이 사람의 미래를 위해 내가 먼저 놓아주는 게 맞아.'
그렇게 미안한 마음에 절대 먼저 전화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가슴을 쳐가며 다짐하면서도, 인간의 마음이란 참 간사해서 내 심장 한구석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주길, 날 잊지 않고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희망하는 어리석은 욕심.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뜻대로 될까.
본가로 돌아와, 그 사람이 제 자취방에서 쓰던 스타벅스 머그잔을 찬장 가장 안쪽에 조용히 넣었다.
스물넷의 겨울에는 공포를 피해 피난하듯 지방의 구원 속으로 도망쳤다면, 이번 겨울은 달랐다.
나는 이제 스스로 내 발로 차가운 겨울 한복판을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내 앞에 놓인 가혹한 고난의 길, 누군가의 수발을 들며 견뎌내야 할 암담한 삶을 향해 비틀거리며 한 발짝을 내딛는다.
창밖으로 차가운 겨울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사람의 씨앗과 기억을 가슴 깊이 품은 채,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나는 먼 하늘 아래 있는 그 사람이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가만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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